그냥 며칠 동안 이것이 계속 머리에서 맴 돌아,
막히는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를 지나며 생각한 것들을 정리해 보았다.
그래서 비약이 좀 많긴 하지만, 논리틀 자체가 많이 틀린 것 같진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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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근대/근대 부모와 ‘근대적 개인’
 몇 년 전 대안 학교와 청소년 문제를 두고 토론하는 자리에서 화두로 나온 것은 청소년들의 ‘외로움’과 ‘불안함’이었다. ‘외로움’에 대하여 서동진 교수는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전근대 부모와 근대의 부모를 나누며 청소년들이 겪고 있는 외로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굉장히 흥미로운 지적이었다. 그는 전근대 부모는 자식과 자신을 동일한 주체로 상정하고 존재론적으로 자신과 자식을 타인 혹은 개인으로 나누지 않지만, 근대적 부모 특히 이른바 386 세대의 부모들은 자신과 자식을 뚜렷하게 ‘개인’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근대 부모 밑에서 자란 자식 -서동진 교수 자신을 포함하여-들은 ‘개 패듯’ 맞기도 하면서 “우리 부모는 나를 왜 이렇게 때릴까?”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것이 존재론적 불안과 외로움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반면 ‘아이는 절대로 때려서는 안 되는 것’이 머릿속에 상정되어 있는 근대적 부모의 기저에는 ‘타인의 몸’이라는 것이 가정되어 있고, 자신이 더 이상 행복해지지 못하면 그 부부 관계가 (그 이전보다는 훨씬 더) 깨지기 쉬우며, 자식이 ‘투자 대상’인지 아닌지를 끊임없이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근대적 부모의 자녀들은 이와 반대로 존재론적 불안이 점점 증폭된다는 것이다.

 얼마 전 한 예술전용 영화관에서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을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중학교 1-2학년즈음으로 보이는 형제가 화장실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영화가 어떤 부분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목소리에는 ‘지루함’이 가득했다. 이른바 ‘성장영화’라는 영화들은 사실 성장기 청소년들에게는 재미없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어른들에게는 자신들이 지나온 과거에 대한 기억을 복원해내면서 그것이 오버랩되기도 하고, ‘신기하고도 재미난’ 어린 친구들을 만나는 재미가 있다면, 성장기의 청소년들에게는 어쩌면 ‘다른 버전의 위인전’처럼 느낄 수도 있고, ‘복원’의 재미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 ‘지루함’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나오려던 찰라, 문 앞에서는 그들의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례를 무릅쓰고 표현하자면) 그 어머니는 “나는 경제적으로는 도시 중산층까지는 아니지만 풍부한 문화 자본을 갖추려고 노력하고 있답니다. 아이들이 원하면 대안학교에 보내도, 사회가 원하는 경쟁 구도에 들어가지 않아도 저는 환영인 ‘개방적 어머니’에요”라고 말하는 분위기가 풍겼다. 솔직히 “전교조 선생님은 아닐까?”하는 의심도 했다. 하여간 그 어머니는 인자한 미소로 아이들에게 “영화 재미있었니?”라고 묻는다. 아이들은 무기력한 목소리로 “네에...”라고 길게 대답을 한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랬으면 ‘감사합니다’라고 해야지”라고 하자 아이들은 “감사합니다...”하고 길게 대답한다.
 두어 달 전 나는 시골집에서 부모님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던 중 아버지께 혼이 났다. 숟가락을 내려놓으면서 “잘 먹었습니다”라고 한 게 화근이었다. 아버지는 “너가 오는 날 특별히 반찬을 더 만들고 신경을 쓴 밥상은 너에게 ‘잘 먹었습니다’라는 인사를 받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데 왜 그런 말을 해서 ‘부모 자식 간의 식탁’을 ‘식당의 식탁’처럼 만드느냐”고 벌컥 화를 낸 것이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그 말이 거슬렸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나의 부모는 나에게 한 번도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요구한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왜 그 엄마는 영화 한 편 보여주고도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아이들에게 강요 비슷하게 했던 것일까? 이것은 자식과 자신이 하나라고 생각한 전근대적 부모와 자식과 자신이 어떠한 지점에서 완연하게 분리된 ‘개인’이 되어버린 근대적 부모 사이의 간극은 아닐까?


2. 전근대/근대 사회의 ‘일상적 관계’에 대한 상상 혹은 가정.
 전근대의 장소와 공간 그리고 관계를 생각해본다. 자신이 실질적으로 거주하는 장소place와 영향을 주고받는 공간space가 거의 일치하던 시절에서, 관계라는 것은 ‘장기적’이며 ‘호혜’를 바탕으로 한다. 익명의 개인과 장소/공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혈연이든 지연이든 모든 관계들이 몇 가지의 범주로 수렴되는 장기적 관계에서 일상의 대화라는 것은 ‘고마움’과 ‘미안함’을 특별히 즉각적으로 상대에게 평가appreciate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타인이 평가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공동체 유지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프리카의 한 부족에서 오랫동안 현지 조사를 한, 한 백인 인류학자는 현지 조사를 마치며 ‘고마움’의 표시로 부족민들에게 소를 잡아 큰 잔치를 열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소 중에서 가장 큰 소를 구해 대접을 하기로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구한 소를 보여주면서 “굉장히 크지 않냐?”고 신나서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 큰 소를 보면서 “난 태어나서 저렇게 왜소하고 볼품없는 소는 처음 본다.”라며 콧방귀를 끼었단다. 그는 자신이 노력을 한 것에 대해서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고 오히려 조롱하는 것을 보고는 깊은 실망감에 빠졌다. 하지만 자신의 행동과 말들이 얼마나 철없는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 부족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부족 사회에서 ‘마을 잔치’는 그동안에 있었던 ‘부’를 재분배 하는 과정이다. 상대적으로 많이 소유한 사람들이 자신의 재화나 음식을 ‘잔치’라는 형식을 통하여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그래야만 권력과 부의 지나친 불균형을 막아 그 부족과 공동체가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부의 재분배로서의 ‘마을 잔치’에서는 ‘가진 자’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고 ‘못가진 자’에게도 일정한 ‘권리’를 부여된다. 따라서 이 과정에서 ‘가진 자’ 혹은 ‘베푸는 자’가 ‘선심’을 쓰듯 하거나 자신의 ‘베품’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어떠한 ‘행동’과 ‘언어’를 기대하게 되면 권력은 더욱 공고화되고 물질을 바탕으로 한 비가시적 폭력이 작동되게 된다. 따라서 ‘마을 잔치’에서 ‘베푸는 자’는 최대한 자신을 낮추게 된다. ‘자신이 구할 수 있는 소 중에서 고른다고 골라봤지만, 이렇게 볼 품 없는 소를 구할 수밖에 없어서 아쉽다’라는 식으로 말을 해야 하며 ‘겸손’해야 하는데, 그 인류학자는 자신의 노력과 ‘물질’을 과시하며 ‘긍정적 평가’를 기대했다. 따라서 그 부족민들은 자연스럽게 ‘거북함’을 느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처럼 장기적 공동체의 관계 특히 ‘이익’이 아니라 호혜와 선물gift로 경제가 운용되는 전근대의 공간에서는 어떠한 개인이 다른 사람에게 한 특정한 물질/비물질적 행위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평가appreciate를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물론 어떠한 사람이 그 사회에 지속적으로 위험이 되거나 ‘삐뚤어지는 언행’을 했을 때에는 ‘따돌림’, ‘뒷담화’ 등을 통하여 그것에 대한 평가를 하긴 하지만, 내가 마을 잔치에 볶은 콩을 더 갖고 왔다고 해서, 내가 영화를 한 편 보여주었다고 해서 상대방이 즉각적으로 ‘고맙다’라고 표현하기를 바라는 것은 그 장기적 관계와 공동체를 해치는 오만함이 될 것이다.


 3. 근대성modernity와 도시성urbanity의 결합된 지점에서 탄생한 ‘감사합니다’와 ‘미안합니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흔히 쓰게 되는 ‘감사합니다’와 ‘미안합니다’는 어떠한 특정한 시공간과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언어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기존에도 존재해왔던 언어들이 특정한 시공간에서 더욱 빈번하고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하여 그 시대에 대한 일종의 증후적 접근symptom approach로 분석을 해볼 수 있다. 이것은 한동안 유행처럼 번져나갔던 ‘기능주의적 문화 분석’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들은 ‘서구 사회에서 악수가 유행했던 것은 서로가 무기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 상대방에게 신뢰와 안전을 보장하는 행위였다’는 식으로 문화 자체를 굉장히 ‘도구적인 무엇’으로 상정하여 해석하여왔다. 결국 그 문화는 생존 자체에 대한 ‘도구’이며 그 도구들의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 문화 분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기능주의적 해석을 넘어, 특정한 언어들이 ‘발견’되고 ‘유용’되는 것을 통하여 그 사회가 그것을 만들어내게 된 기저의 맥락들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감사합니다’와 ‘미안합니다’는 굉장히 즉각적으로 특정 순간과 언행에 대한 평가이고 이것은 어떤 지점에서 장기적 공동체에서 호혜와 선물이 중심이 된 세계와는 이질적인 특성이다. 관계가 장기적 호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어떠한 순간에 자신 또한 ‘그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평가들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와 익명을 중심으로 한 근대의 시공간에서는 그 관계들은 장기적 호혜 관계가 아닌, 단기적 이익 관계로 변화하게 되고, 이때 벌어질 수 있는 관계의 갈등과 마찰을 가장 유연하게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이러한 ‘즉각적 평가’ - ‘감사합니다’와 ‘미안합니다’가 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언어는 거대한 도시들을 만들어낸 근대와 산업자본주의가 만들어낸 하나의 ‘현상’이 된다. 올림픽 이후 1990년대 한국의 미디어들에서는 한국 사람들이 ‘감사합니다’와 ‘미안합니다’라는 것에 너무 인색하다며 일상적으로 사용하자는 일종의 문화 계몽운동들을 진행한 바 있다. 서양에서는 길을 걷다 상대방과 부딪혔을 때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서로 주고받고, 작은 배려에도 ‘감사합니다’라는 표현을 한다며 그러한 ‘따뜻한 공간’으로 도시 공간과 관계들을 재편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다시 말해, 압축적 고도 근대화를 겪으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한 거대 도시라는 이익과 익명성을 바탕으로 한 시공간에서 개인들은 시공간이 바뀐 만큼이나 ‘언행’을 바꾸어 내지는 못했고, 그 결과 ‘근대 도시적 언어’가 결여된 곳에서 발생하는 ‘지체’ 현상들로 인하여 사회는 굉장한 몸살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그 당시 공중전화를 오래 쓰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이 없어 칼로 살인을 저지른 경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문화계몽운동’이 이뤄질 때즈음 천주교쪽 단체들에서도 ‘내탓이오’라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이 두 말은 도시가 없었더라면, 이익 관계가 없었더라면, 익명의 공간이 아니었다면, 단기적 관계가 아니었다면 나타날 수 없었던 도시와 근대가 만들어낸 언어일 것이다. 도시라는 거대한 공간에서 관계에서 발생하는 ‘마찰의 비용’을 줄이고 ‘따뜻한 공간’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이 말 뒤에는, ‘우리는 서로 모르는, 짧은 만남의, 자신의 이해만을 따지는 그런 관계이지요’의 처절한 외로움과 분리된 개인만이 존재하는 아이러니들을 가득 담고서 말이다.

생각에 도움을 준 문헌들
앤서니 기든스, 현대성과 자아정체성
마르셀 모스, 증여론
스튜어트 홀, 모더니티의 미래
한국문화인류학회,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Posted by Q-Ho

2009/06/11 22:42 2009/06/11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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